나의 할아버지

5ch VIP 개그 - 2009-03-31 16:03

중학교 시절, 흔히들 그렇듯이 한때 삐뚤어진 젊음을 동경했다.
도둑질이나 약한 아이들에 대한 협박 등을 반복하던 그때-

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점원에게 잡혀, 부모님의 연락처를 불게 되었다.
부모님은 안계시다고 거짓말을 하고 어차피 할아버지는 왕진을 가셔서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
할아버지의 연락처를 말했다.

그러나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곧바로 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가게로 달려오셨다.
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마루바닥에 이마를 조아리고는

「죄송합니다, 죄송합니다」

하며 사과를 하셨다. 어릴 적부터 나의 자랑이었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기 흉하게 굴욕적으로 사죄를
비는 모습을 보노라니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어느샌가
머리를 조아렸다.

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쭉 아무 말도 없었다.
역정을 내시지도, 뭔가를 묻지도 않고 그저 침묵.
오히려 그게 더 괴로웠다.

집에 곧 도착한다, 싶을 무렵 갑자기 할아버지가

「너 술 마신 적 있냐?」

하고 물으셨다.

「없어요」라고 하자 할아버지는

「좋아, 가르쳐주마」

하고 한 마디 하신 후 성큼성큼 걸어갔다.

도착한 앞은 스넥바 같은 곳.
거기서 취할 때까지 술을 먹게 되었다.
평상시 일하는 모습 밖에 본 적 없는 할아버지가
술 마시는 것을 보는 것도,
함께 이런 곳에 있는 자체가 어쩐지 이상했다.
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돌아가는 길 인근의 강가에
앉아 쉬고 있자 할아버지가 불쑥

「이 할애비는 일 밖에 몰랐어.
 너는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다 경험해볼 수 있으니 부럽구나. 
 너는 남자다.
 가끔은 나쁜 짓을 해보고 싶기도 할게다.
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좋다.
 다만 인생을 그르칠 정도로 큰 나쁜 짓은 저지르지 말거라」

그 말을 들으니 왠지 긴장의 실이 끊어지며 한참동안이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.

그리고 내 삶이 바뀌었다.
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기로 결정, 필사적으로 공부했다.
재수까지 해가며 국립대 의학부에 합격했다.

올해, 졸업했습니다.

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집 외에
또 하나 남겨 준 것.
그것은 매일 목에 걸고 계셨던 청진기.
그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목에 걸려 있던 청진기.
그 청진기를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됐다.
이제는 녹이 슬어버렸지만 그래도 나의 보물.

나도 할아버지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.


댓글

ㅁㅁ (2009-03-31 16:03)

선리플 후감상 ㄳ 꺅 첫번째 리플 ㅜㅜ

lakemisty (2009-03-31 16:03)

멋진 할아버지군요. 닥터 고토진료소를 읽은 후라 더욱 멋져보이네요.

kenjak (2009-03-31 17:03)

영감님 멋있어!!

하나 (2009-03-31 17:03)

으아아아아앙 ㅠㅠ 머시써 ㅠㅠㅠㅠㅠ 감동적이네요. 으윽!

공대생 (2009-03-31 17:03)

아아.... 저런 할아버지가 내게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........
(2009-03-31 17:03)
그럼 지금쯤 닉네임이 의대생이 되어있었겠죠...
아요이 (2009-04-01 17:04)
뿜긴다. ㅋㅋㅋㅋㅋㅋㅋ
빡구 (2009-04-01 22:04)
흐음...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지 않나요? 자...으아악!!! 우리집이!!!!
'ㅅ' (2009-04-01 23:04)
공대생 님께는 멋진 엔지니어 할아버지가 계시잖아요! (...죄송)
공대생 (2009-04-02 17:04)
아쉽게도 저희 할아버지는 건축사.........시죠
.... (2009-04-09 23:04)
아키텍트가 될 운명이시군요..

심영 (2009-03-31 18:03)

이보시오 의사양반 ..
의사양반 (2009-03-31 18:03)
아, 안심하세요 여긴 병원입니다
(2009-03-31 19:03)
아니 이게 어떻게 된거요
ㅇㅍ (2009-03-31 20:03)
에... 총알이 영 좋지 않은곳에 맞았어요
심영 (2009-03-31 23:03)
고자가 됐다.....그 말인가? 고자라니 아니 내가 고자라니!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내가 고자라니!!
매드사이언티스트 (2009-03-31 23:03)
걱정하지 마십시오. 이시대 최고의 과학자를 불러 없앨건 없애고 만들건 만들었습니다.
지나가던 손님 (2009-04-01 01:04)
잠시 좌약을 넣겠습니다.
마늘 (2009-04-01 01:04)
(양손으로 어깨를 짚는다)
지나가던 빌리 (2009-04-01 04:04)
오마이숄더!
김왕장 (2009-04-01 06:04)
모두의 댓글로 만들어낸 훌륭한 문학작품.
휘바할배 (2009-04-01 08:04)
아놔 ㅋㅋㅋㅋ 좌약 -> 오마이숄더 아 미치겠다 ㅋㅋㅋㅋㅋㅋ
55 (2009-04-01 13:04)
여기가 네이버 만화 댓글란이냐

DaFlea (2009-03-31 18:03)

음~ 나도 부러워~ 저 손자가 부러워~~

ㅇㅇ (2009-03-31 18:03)

"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가게로 달려오셨다" "그것은 매일 목에 걸고 계셨던 청진기. 그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목에 걸려 있던 청진기." 흠.. 과연?
ㅇㅇ (2009-03-31 18:03)
... 이라고 쓰고 보니까 왕진 다니던 시대구나. 그럼 말이 되네 (-ㅂ-)
(2009-03-31 18:03)
독백 종료

... (2009-03-31 18:03)

아.. 언제부턴가 리라하우스에서 감동글을 기대하면서 들어오게 되었어..
jun (2009-04-01 20:04)
이제 반전따위 생각지도 않지요.

마술potato (2009-03-31 20:03)

좋은글 번역 감사합니다 _._

john6 (2009-03-31 20:03)

좋네요, 이런 글도.

선배거긴안돼 (2009-03-31 21:03)

이런 의사만 있다면 세상엔 살기 좋은 거군요

샤넬붕어 (2009-03-31 21:03)

의사선생님께서 자라나는 청소년한테 술을 맥이셨을까요?;
만차스 (2009-03-31 22:03)
난독증..인지.. 의사로써도 뭣도 아닌 하나의 할아버지로써 손자를 대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

teal (2009-03-31 22:03)

일밖에 모르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그런의사?
까칠 (2009-04-01 00:04)
일밖에 모르다가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... 백수라도 될까요? 이런 댓글 촌철살인의 재치도 없고, 그렇다고 하나도 쿨하지 않아요. 좀 자기 감정에 솔직히 삽시다.
teal (2009-04-01 23:04)
백수라뇨 좋은의사되야죠 저도 노력중이랍니다

ㅇㅇ (2009-03-31 23:03)

불량아 주제에 날 울리지마라 휘밤 ㅠㅠ

D.D (2009-04-01 00:04)

저 당시 옛날엔 적어도 저런 할아버지의 옛 지혜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. 요즘엔 "과거"는 트렌드가 지나고 "현재" 나 "미래"가 지향해야할 무슨 "이즘"처럼 번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;; 저도 할아버님집에 가끔놀러가곤 했는데 "주역"정도를 공부하시거나 밭에 농삿일을 꾸리는 정도의 일을 하시고계셨습니다. 근데 저희가 너무 어려서 그런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기 보다는 -할애비죽으면 몇일을 울 것 인가- 정도의 얘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들중에 이해가 되는 얘기가 저 얘기 밖에 없어서 저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ㅠㅠ 커서 좀 찾아가려고 해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ㅜㅜ 아 할아버지 오래사셔요 ㅠㅠ

ke (2009-04-01 19:04)

손자야 반성의 시간이다. 곧휴에 알보칠을 발라주마.
손자 (2009-04-01 20:04)
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고자가 된다.. 그 말인가?
jun (2009-04-01 20:04)
비보이가 될 시간이군요.

루넨 (2009-04-04 10:04)

...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영향으로 한 때 교사가 될까... 했던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. ...물론, '교사가 될거야'라고 하니 가장 역정을 내셨던 것도 할아버지셨습니다만... (아무래도 평생을 교사 하시다 보니 그 직업의 힘든 점, 그리고 제 성격이 교사에 극히 맞지 않는다는 점 등을 알고 그러신 것이지만...)

2010년12월 (2010-12-15 14:12)

너무 감동적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